2013년 7월 26일 금요일

짧은 생각정리

애틀란타, 덴버, 보스톤, 신시네티, 콜롬버스, 렉싱턴, 피닉스 를 거쳐서 이번 출장의 마지막 기착지인 LA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오늘 포함 남은 이틀은 여유있는 일정이니 한숨 돌릴 수 있어서 좋다. 우중충한 애틀란타가 아닌 캘리포니아 남부의 햇살 아래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점은 덤.

애초 석달이던 출장이 2주로 줄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겠지만 그 짧은 기간으로 외할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켜드리지 못했으니 어쩌면 가장 길었던 출장이 아니었을까 싶다.

출장 자체도 쉽지 않았다. 어느 곳에서는 몇주 전 약속한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문전 박대를 당했고 어느 곳에서는 가져간 자료를 제대로 소개도 못하고 가격만 추궁 당하기도 했다. 호텔에서, 렌터카 데스크에서, 택시에서 내 예악 정보를 보거나 어디 다니냐는 질문을 통해 직장명을 알고 나선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며 최고의 회사라고 이야기 하는 일반인들의 모습과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

이미지가 중요하게 먹히는 컨슈머 시장과 기업 시장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여기선 단순하지만 가혹한 논리만 통용된다. 얼마나 당신의 이익을 양보해서 내게 돌려줄거냐는 질문. 개인은 인격이 있지만 법인은 인격이 없다. 그래서 그 첨예한 창끝에 서서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건 항상 어렵다.

하지만 그래도 개발을 뛰쳐나와 이곳에 서기로 한건 결혼 이후 가장 잘한 결정인듯 싶다. 계속 개발 라인에 있었다면 어떻게 이렇게 넓어진 시야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이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의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유독 한국의 개발자들은 시장의 흐름과 동떨어진, 오로지 개발에만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어찌보면 순진한 하지만  조금은 답답한 곳. 성향이 맞다면 모를까 나와는 맞지 않는다.

어쨌든 이곳에서 얻게된 약간의 여유를 이용해 고민중인 것들을 정리해봐야겠다. 어떻게 하는게 최선인지. 아니. 어떻게 하는게 가장 후회를 남기지 않는 방향일지.

2013년 7월 18일 목요일

상실 - 喪失

지난 이틀간의 덴버 일정을 마치고 애틀란타로 넘어오는 길은 유난히 힘들었다. 애틀란타에는 강항 비바람이 몰아붙이고 있었고 공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비행기는 쉴 새 없이 흔들렸고 활주로에 내릴때는 동체를 크게 좌우로 한번 흔들어서 나지막하게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 얼마전 아시아나 항공 사고가 떠올랐으리라. 공항에서 숙소로 오는 길도 비가 너무 심하게 와서 두번이나 길을 잘못 들었다. 애틀란타에서 운전하기는 처음이었고 밤에, 비까지 오는데다 한박자씩 반응이 느린 네비게이션은 끊임 없이 나를 괴롭혔다. 5일간 지낼 숙소인 탓에 레지던스인으로 잡았는데 출입구를 찾지 못해 차에 내려 비를 쫄딱 맞아야 했다. 자정이 넘도록 저녁을 먹지 못하고 있어서 오는 길에 사온 냉동 피자를 전자렌지에 넣어놓고 이래저래 힘들었던 하루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좋은 소식은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기분 좋게 집으로 연결한 전화를 통해 전해진, 외할머님께서 소천 하셨다는 청천벽력같은 아내의 이야기. 계속 안좋으시긴 했지만 어떻게 이렇게 공교롭게도 내가 출장을 나온 시기에 세상을 등 질 수가 있으신건지. 어렵다는 걸 알았지만 급하게 알아본 항공권으로는 아무리 빨리 도착해도 발인 다음날 오후 늦게나 되어야 한국에 도착할 수 있는 상황. 한국으로 들어가는 걸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각별한 사람을 꼽으라면 난 주저없이 외할머님을 꼽는다. 젖먹이 시절, 생계를 위해 항상 시간이 없으셨던 어머니를 대신해서 내가 철이 들 때까지 날 키워주신 분이 외할머님이었다. 유난히도 고집이 세서 한번 울기 시작하면 목이 쉴 때까지 울었다는 나를 말 없이 거둬주신 분도 그분이었다. 울고불고 하는 어린 나한테 지쳐서 내다 버리라고 화를 내시는 아버지, 다정하게 다독이는 것 자체가 비교육적이라고 생각하셨던 어머니로부터 나를 데리고 나와서 몇시간씩 업고 집 앞 역전 광장을 얼르면서 돌아다니시는 일이 셀 수 없이 많았다고 했다. 초등학생때 연탄가스에 중독이 되어 죽을 뻔 했던 나를 살리신 분도 그분이었고 지나치게 엄격했던 집안 분위기에 힘들어 하는 나를 따뜻하게 안아 주신 분도 그분이었다. 잠이 들 때면 외할머니 품에서 잠이 들었고 조금 더 큰 후에는 (내 기억에 유치원 정도였을 것이다) 계단을 올라갈때면 할머니 손을 잡고 끌어드리기도 했다. 항상 몸이 안좋으신 탓에 소화를 잘 시키지 못하셔서 진지를 드시고 나면 할머니 등을 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두드려 드리는 것이 싫지 않은 식후 일상이 되었었고 더이상 날 봐 줄 필요가 없게 되서 지방으로 내려가신 후에는 방학마다 할머니한테 가서 한달씩 있다 오는 재미로 방학을 기다리곤 했다. 같은 음식을 연달아 내놓는 일이 없을 정도로 그 한달은 할머니의 음식 솜씨를 나를 위해 100% 발휘해 주시는 한달이기도 했다.

지난번에 찾아 뵈었을 땐 치매가 심해져서 날 알아보지 못하셨었다. 그래도 할머니의 손을 잡고 바라보며 살아 계신 것만으로 좋기만 했다. 한편으로는 더 고생하시지 말고 편안하게 가시기를 기도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이렇게 가시는 길도 뵙지 못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내와의 전화를 끊고 바닥에 주저 앉아서 통곡을 했다.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콧물하고 범벅이 되서 한참을 그렇게 애가 되서 울었다. 이번 출장이 끝나고 나면 바로 돌아오는 여름 휴가때 한번 더 찾아 뵙자고 아내하고 일정을 잡았었는데, 출장 끝나고가 아니라 출장 전에 다녀왔어야 했다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온다.

정말로 한달음에 달려가서 가시는 마지막 길을 지켜드리고 싶다. 이 상실감을, 이억만리 타지에서 찾아온 이 상실감을 도대체 어떻게 추스려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