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13일 일요일

하바방

페이스북 친구 리스트를 보다가 하바방 출신들을 모아보곤 참 많이들 변했다...싶어 조금 감상적이 됐다.


자바 책을 사들고 와서 전자기학 실험실에서 밤새던 수석 입학 선환이가,
하바방에 모여 시험 공부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랑 같이)유유히 맥주 마시던 선영이가,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이 틀렸다고 주장하던 신입생 미옥이가,
전시회에 다녀와서 감상문 대신 자작 기타 연주곡을 녹음한 테이프로 레포트 대체했던 성호가,
순대국을 처음 먹어본다며 원래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냐고 물어보던 후영이가,
웃으면 얼굴에 주름이 많다고 선영이한테 놀림받던 울트라 슈퍼 범생 길환이가,
항상 엄마가 아이들 챙기듯 후배들(가끔 선배도) 돌보고 야단쳐가며 챙기던 주원이가,
후배들에게 연습문제 풀어주며 타고난 학자처럼 생활하던 정호가,
덩치에 걸맞지 않게 선배들에게 귀여움 많이 받던 경민이가,
말이 느리다 못해 듣다보면 앞에 이야기 까먹게 만들던 과대표 성훈이가,
도깨비 같은 얼굴 하고 항상 후배들 잡아먹을 준비하던 양도가,
농구공과 혼연 일체가 되어서 학교 다니던 재홍이가,
이름보다 거북이라고 불러 달라고 노래하고 다녔던 승원이가,
현대물리 수업을 양자 수업으로 바꿔 버렸다고 동기들의 지탄을 받던 재혁이가,
생긋 웃고 다니는 얼굴로 모든 사람과 잘 지냈던 민우가,
책임감이 너무 강해 뭘 맡으면 항상 심각한 얼굴 하고 다니던 재환이가,
항상 액티브 하고 겨울이면 스키장이라고 얼굴에 써놓고 다니던 창우가,
반박자씩 느리긴 해도 매사에 열심히 노력해서 극복해 나가던 병철이가,
(헥헥..너무 많아서 동기나 선배는 생략)


이 모든 사람들이 하바방이라는 공간에서 어울리던 그 때, 지금의 모습들을 난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몇몇은 대충 짐작한대로 살고 있긴 하지만. ^^)

우리가 각자 걷는 길이 그 시절 그 공간에서 겹쳐졌었다는 사실이 정말 너무나 기적같다. 그리고 그 기적을 이 사람들과 함께 누렸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고 또 감사하다.

하바방이라는, 지저분한 쇼파 두개와 녹색 페인트가 칠해진 4인용 책상 하나 그리고 낡은 책장 두개가 놓여있던 그 공간이 무척 그리워지는 날이다.

2011년 2월 9일 수요일

둘째 만나는 날 확정

오늘 의사가 수술 일정을 확정 지었다. 날짜는 2/16 일로 예정일보단 한달 가량 빠르지만 인큐베이터는 면할 수 있단다.

요녀석, 나오면 엉덩이를 때려 줘야지. :-)

2011년 2월 8일 화요일

토론의 기준

모든 주장에는 도저히 포함시킬 수 없는 극단이 존재한다. 이 극단은 말 그대로 극단적인 경우이며 이러한 부분까지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건 토론이 목적이 아니라 단지 상대방을 입다물게 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그러한 상대와의 토론은 더이상 진행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정치인은 능력보다 도덕성이 중요하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 그렇다면 무역이 뭔지도 모르지만 아주 도덕적인 사람을 대통령으로 앉혀야 하는 거냐는 질문을 제기한다면 그 사람과는 더 이상 토론할 필요가 없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에 대한 질문은 토론에 너무나 자주 등장한다. 상대방의 논리를 궁색하게 하는데 이보다 효과적인 수단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이클 샌델과 같은 이시대 최고의 철학자들 마저도 반대 논리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없는 지점까지 상대의 논리를 계속 밀고가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우리가 토론을 할 때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은 상대 주장의 극단에 받아들이기 힘든 무엇이 있느냐가 아니라 상대의 주장이 갖고 있는 보편적 판단 기준이 어느 선에서 그어지고 있느냐이다. 그리고 그 선이 바로 타협의 기준선이 된다.

물론 형이상학적 논리에 실제로 접하게 되는 많은 개별 상황들에 대한 기준선을 일일이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그러한 고민은 최소한 우리로 하여금 서로 접근 가능한 타협의 언저리에 머물게 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할 수 있다.

토론의 목적은 상대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최선의 결론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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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 샌델이 그의 저서 Justice에서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자기 결정권에 기반한 안락사 옹호를 비판하면서 합의하에 서로가 먹고 먹혔던 2001년 독일에서 발생한 브란데스&마이베스 사건을 예로 든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2011년 2월 7일 월요일

공교육

연합뉴스 :: 체육수업 합법적으로 몰아서 한다
m.media.daum.net/media/sisa/newsview/20110207053206558

아침 뉴스에 체육 수업을 합법적으로 몰아서 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기사가 떴다. 읽으면서 참 한심했다. 나 때도 분명 체육 수업은 형식적으로 진행됐지만 이제 대놓고 그런 짓거리를 하게 됐구나. 공교육의 질적 정상화에 대한 이슈가 지난 십년 넘게 있어 왔는데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교육 관계자들의 수준은 일보도 전진하지 못한 듯 하다.

학부모들의 시선이야 근시안일 수 밖에 없다 쳐도 그들을 설득하고 멀리 내다봐야 하는 교육 관계자들의 수준도 같은 근시안이라는 사실은 한숨을 쉬게 만든다.

2011년 2월 6일 일요일

페이스북 소셜 댓글을 기다림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에 댓글을 디스커스 서비스를 이용하여 붙이고 있는데 실제로 댓글이 주로 달리는 곳은 페이스북이다. 블로그에 포스팅 되면 페이스북에 자동으로 뜨도록 설정해 놓았기 때문인데 실제로 지인들이 페이스북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어서 이쪽에 댓글이 많이 달린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댓글 시스템을 통합하고 싶다.(지금은 디스커스, 버즈, 페이스북의 세곳에 댓글이 달린다)

최근 소셜 서비스를 이용한 소셜 댓글이 주목을 받고 있다. 조만간 페이스북에서도 이러한 소셜 댓글 서비스를 내놓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그럴경우 블로그에 페이스북 소셜 댓글 시스템을 부착할까 고민중이다.

악성 댓글을 어느정도 막을 수 있고, 분산된 지인들의 댓글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을테니까.

2011년 2월 2일 수요일

공증 문서 정치의 시대

정치는 말로 하는 싸움의 가장 높은 단계이다. 그래서 정치인에게 최고의 덕목은 신뢰이다. 자신의 말에 일일이 증거를 대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신뢰를 바탕으로 설득을 하는 것이 백배는 효율적이며 바람직한 정치 행태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찬성하고 반대하고를 떠나 상대방의 주장이 토론 후에 갑자기 바뀐다면 토론 자체가 성립되지 않고 따라서 정치 행위가 불가능 하다.

따라서 미국에서 이야기 했던 "표를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말이든 못하겠느냐" 라는 발언이나 "충청권의 표를 위해 했던 (발언)공약일 뿐 공약집에도 없다" 라는 말을 신년 좌담에서 부끄러워 하지도 않으며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정치인은 정치인의 자격이 없다. 공약집에 없다는 것으로 면피가 된다는 그의 발언에는 "주어가 빠졌던" 과거 사례처럼 법적으로 인정되는 증거만 없다면 정치인의 발언은 언제든 뒤집어도 된다는 천박함이 담겨 있다. 더군다나 그는 손학규나 안상수같은 잔챙이가 아니라 모든 국민의 바로 아래이자 모든 정치인들의 정점의 자리에 서 있는 대통령이다.

그에게 묻고 싶다.

"당신 주장대로라면 이제 대한민국 정치인의 모든 발언은 법적 효력이 있는 공증 문서로 남겨야 하는 시대로 가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