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29일 화요일

제니, 세상을 뜨다


우리집 애완견 제니가 오늘 세상을 떠났다. 명이 다해 숨을 거둔 것이 아니라 백내장으로 인한 실명, 고령으로 인한 치매와 더불어 아래배에 생긴 종양으로 인해 너무나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더이상 두고볼 수가 없어 병원의 동의하에 안락사를 선택했다. 지난 몇주동안 제니는 통증을 이기지 못해 쉴새없이 신음과 비명을 번갈아 질러가며 고통스러워 했었다.

하지만 한살때 우리집에 와서 스무살이 되는 해에 세상을 떠났으니 주먹만한 요크셔테리아 종으로써는 천수 이상을 누리고 떠났다고 해도 억지 주장은 아니리라.

지난 몇 달간 치매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녀석이 별안간 제정신이 돌아온 듯 병원에 데리고 갈 때 무언가 눈치를 챘는지 그토록 가기 싫다고 울부짖더라는, 잔뜩 목이 잠긴 수화기 너머 어머니의 목소리가 그처럼 가슴 아플 수가 없었다.

제니가 우리집에 왔을 때가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거나 중학교 입학한 직후던가 했던걸로 기억하고 있다. 철부지 시절부터 사춘기를 지나 대학입학, 군 복무 기간은 물론이고 결혼을 거쳐 서른을 넘긴 지금의 나이까지 나와 함께 했으니 가족이라 해도 무리는 없으리라. 마지막 가는 걸 내가 지켜 줬어야 하는데....그러지 못했다. 잠깐 청주 고향집에 내려보내 놓는다고 보냈던게 마지막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지난 20년간, 가족들(새로 가족이 된 내 아내까지 포함해서)의 사랑을 넘치도록 듬쁙 받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좋은 곳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굿바이 제니.

2008년 1월 26일 토요일

42 의 비밀


얼마전 아내와 삼청동에 위치한 내서재를 찾았다가 몇해전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던 책을 발견했다. 다름아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유아적인 정신연령을 지닌 천재 과학자가 쓴 듯한 이 소설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쾌함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독자가 일정수준 이상의 수학적(혹은 과학) 마인드가 없다면 이 소설이 주는 유쾌함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단점 역시 함께 갖고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확률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소설에 등장하는 무한 불가능 확률 추진 엔진에 대한 설명에서 폭소를 터트리지 못하게 될 것이고 무한 불가능 추진기가 가능하려면 역으로 유한 불가능 추진기와 따뜻한 차 한잔이 필요하다는 추론에서 무릎을 치면서 감탄하지도 못할 것이다.

지나치게 서양 문화에 편중되어 있는(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등장 인물들의 유머와 '상상력'을 발휘하기 보다는 '암기하는' 수학과 과학만을 가르치는 대한민국의 교육과정 덕분에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히트하지 못한 것 같지만 서양에서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소설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국제수학올림피아드의 만점이 42점 이란 사실에서 위원들을 센스쟁이라고 지칭하는 내가 조금 오버하는 것일까?

하지만 정말 이 소설에서 주장하는대로 삶, 우주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궁국의 질문에 대한 답이 42 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


ps
주말에 출근해서 어지간히 일하기가 싫은 모양이다. :-p

UPDATE 2008.1.26. 10:48AM
조금전에 출근한 후배하고 이 책 이야기를 했더니 외국에서도 매니아들이나 해당 전공자들에게만 인기가 있는 책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따뜻한 차 에서 입자의 브라운 운동과 무질서도를 떠올려 추론에 적용 해내는 것이 정상이냐는 그 후배의 주장에 그런가 싶기도 하다. 대한민국 교육은 그럼 이상 없는건가? 음...일하자 일. ㅡ_ㅡ;;;

2008년 1월 24일 목요일

그들이 우리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려면 몇년이 지나야 하는 걸까

유치원 다닐때 누가 커서 뭐가 될거냐고 물어보면 자신있게 "과학자요!" 라고 대답했었다. 공학이 세상을 이끌어 간다고 믿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때는 과학자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존재라고 믿었었던 것 같다. 그 이후에는 같은 질문에 "물리학자" 라고 대답을 했었다. 조금 더 구체화가 되긴 했지만 사실 칼 세이건 의 '코스모스' 를 읽은 영향이 컸다. 당연히 이 당시에 내가 이야기 했던 물리학이라는 것을 정확히 표현하자면 '천체 물리학' 이었다. 그리고 그 천체 물리학의 매력에 어린 나이에 흠뻑 빠져들고 말았었다. 우주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구하여 이 세상의 근원을 추적하는 학문! 정말 멋있었다.

그래서 결국 온갖 반대를 무릎쓰고(아버지는 공학 우월주의자셨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기초학문 분야 역시 조금은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셨었다.) 물리학과에 입학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입학 후 몇년이 지난 후, 멋있어 보이긴 하지만 천체 물리학이라는 학문을 하기에 난 그다지 똑똑하지 못하다는 사실과 내 머리로 그 분야를 선택했다간 굶어죽기 딱 좋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세상엔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았다. 몇년의 방황후에 방향을 선회했고 그 다음 분야는 광학이었다. 물론 광학이 천체물리학보다 쉽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교수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는 천재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살벌한 분야는 아니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흘러왔다.

아직 확실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슬슬 학위논문에 대한 이야기가 교수님 입에서 흘러 나오는 요즘에는 드디어 졸업이 눈에 보이고 있다. 여기저기서 학위 받으면 오라는 곳도 있고 내가 가고 싶어서 찔러보는 곳도 있는 현 상황에서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박사 학위가 잡힐 것도 같다. 만일 이대로 순조롭게 풀려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되면 난 꿈을 이룬게 된다. 다른 것도 아닌 코흘리개 시절의 꿈을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학위취득 후의 시간이 손에 잡힐듯 가까와져 오고 그로인해 내 앞날에 대해 고민하게 되면서부터 다른것도 아닌 내 '꿈' 이 옳은 것이었는가 하는 회의가 오고 있다. 회의를 가져온 가장 큰 이유는 한국내 기초학문 연구자에 대한 처우를 바라보며 느낀 현실에 대한 절망이었다. 우리 부부가 전부 외동만 아니었다면 벌써 외국으로 나가는 것으로 내 인생을 틀었을 것이다.

하지만 둘 다 형제가 없어 양가 부모님들을 모두 챙겨야 하는 입장에서 내가 좋자고 한국을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결국 한국에서 살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달고 알아본 첨단분야 연구자의 앞날은 답답하기 이를데 없었다. 사회가 인정하는 내 가치가 고작 이정도인가 하는 자괴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직업의 귀천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그 사회에 가져오는 부와 행복의 수치만큼의 대접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의 첨단산업을 만들고 이끌어 가고 있는 연구자들이 창출하는 사회적 가치가 결코 작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휴대폰 원천 기술을 개발한 몇명의 연구자가 만들어 낸 가치가 휴대폰 생산 라인에 근무하는 수만명의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가치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포털 사이트에 짧게 적었더니 노동자의 가치를 폄하한다는 댓글이 수없이 달렸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숙련공이 신입보다 많이 받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숙련공이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에 대가를 많이 받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 숙련공이 일하는 공장이 있을 수 있게 한 연구자가 받아야 하는 대가는 과연 얼마여야 하는 걸까.

사실 공학이든 자연과학이든 박사학위까지 받는 사람들은 조금 바보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들이 바보라서가 아니다. 어린시절부터 각자의 집에서, 학교에서 수재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의 집단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자들이 아니던가. 그런 사람들이 바보일리가 없다. 단지 그처럼 똑똑한 사람들이 바보 소리를 들을 만큼 다른 일에 관심을 끊은 채 한 분야에 집중해야 할 만큼 어려운게 공학이고 자연과학이라고 해석하는게 옳을 것이다. 막말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싫어했다는 수학과 물리. 싫어한 이유가 무엇인가, 어려워서가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던가.

그런 이유로 연구자들은 조금 바보스럽다. 이윤에 밝지도 못하고 인사 문제에도 적극적이지 못하다. 밥그릇 지키는 것에도 둔하다. 농진청 없어진다고 여기저기서 난리를 칠 때, 과기부 없어진다는 소리 들은 과학자들 대부분은 그저 고위직 몇몇이 애를 쓰고 있을 뿐 대부분은 그런가보다 한다. 그러니 IMF 때 제일 먼저 정리해고 당한 것도 연구직이고 회사에서 스마트하지 못하다는 비아냥을 듣는 것도 연구직이다. 그건 요즘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게 본다면 연구자들은 사회에서 약자로 분류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스스로를 지킬 줄 모르는, 하지만 꼭 필요한 약자. 하지만 아직 한국 사회는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 또 한명의 지인이 한국을 떠난다는 연락을 해 왔다. 과학자들의 탈 한국 현상이 어제 오늘 있어왔던 것은 아니다. 이미 수많은 선배, 동기들이 한국을 떠났고 떠나고 있다. 하지만 그 지인이 보내온 편지는 날 하루종일 울적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네가 말했던 것처럼 그들이 우리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려면 몇년이 지나야 하는 걸까. 하지만 너와 다르게 난 이제 기대를 버렸다. 그들이 우리에게 돌아와 달라 애원한다 하여도 난 결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다. 과거 조국을 위해 일해 달라는 요청에 다 벗어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던 과학자들이 지금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하면 이유가 될까...

단언하건데 첨단분야 연구자들은 사회의 그 어떤 직종 근무자들과 비교할 수 없는 장점을 갖고 있다. 공무원이나 일반 직종 근무자, 운송업, 생산직 근로자 등등 그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비교해 봐도 첨단분야 연구자들 만큼 다른 나라로의 이직이 쉬운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단순 취업이 아니라 이민이라고 한다면 한국을 떠다기는 훨씬 쉬워진다.

한국 과학계가 지금까지 버텨온 것은 과학자들도 한국의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식이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유교적인 전통과 교육속에 성장해온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지만 점차 한국의 현실은 그러한 과학자들이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큰 절을 올리고 비행기에 몸을 싣게 만들고 있다.

한국 사회가 이들을 향해 애타게 손짓을 하는 것은 언제쯤이 될까. 산업을 일으키고 싶어도 과학자들이 없어 이들에게 조국을 위해 돌아와 달라고 사정했던 박정희 대통령 정권 시절만큼 산업이 퇴보해야 하는 것일까.

2008년 1월 18일 금요일

별을 찍다


, originally uploaded by Ki-young Choi(최기영).

태어나서 처음으로 별 사진을 찍어 봤다.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등 뒤에선 펜션의 환한 불빛이 비추고 있었고 셔터 를 개방한 채 고정해야 하는 셔터 리드선은 고장이 나서 제대로 셔터 개방 후 고정이 되지 않았다. 이때문에 정신이 팔려서 미러업 버튼을 눌러 놓는 것도 잊었고 초점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초점을 깜빡 한건 술에 취해서 그랬던 것 같지만;; )

어쨌든 며칠만에 현상해본 별 사진은 생각했던 것 보다 흡족했다. 유일한 아쉬움이라고 한다면 이때 사진을 찍을때의 조리개값과 셔터스피드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것. 덕분에 다음에 찍을 때도 사전정보 없이 맨땅에 헤딩해 보게 생겼다.;;

재미있는 사실은 난 분명 딱 두컷 찍고 숙소로 돌아온 것 같은데 돌아와 보니 열댓명 남아있던 주당들이 두명으로 줄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취해서도 구도, 조리개, 셔터스피드 등을 결정하느라 고민을 무척 오래 했었나보다. 그렇게 취한 상태에서 삼각대 짊어지고 나가서 앵글 잡고 조리개, 셔터스피드 맞춰가며 찍은게 더 신기하지만. ㅡ_ㅡ;;

2008년 1월 17일 목요일

별똥벌레


별똥벌레, originally uploaded by Ki-young Choi(최기영).

늦은 밤.

풀 숲에 돌을 던지자 수많은 별들이 하늘로 날아 올랐다.

2008년 1월 13일 일요일

해 지는 풍경 - 익숙함에 대하여


seoul tower, originally uploaded by Ki-young Choi(최기영).


“어떤 날은 마흔세 번이나 해 지는 풍경을 바라보았어!”

- 생텍 쥐페리 '어린왕자' 中 -


내가 사진을 찍기 시작한 이래 가장 많은 셔터를 누른 곳이 아마도 서울타워가 보이는 이 장소일 것이다. 그저 해질 무렵에 5분만 걸어가면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 있다는 이유로 인해 내가 가장 사진을 많이 찍는 곳이 된 그런 곳이다.

그런데 어느날 돌이켜 보니, 처음엔 그저 쉽게 접근이 된다는 이유로 자주 찾았던 이곳과, 이곳에서 바라보는 해질녘 하늘을 내가 무척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하면 슬쩍 서쪽 하늘을 한번 살펴보곤 제법 볼만하겠다는 판단이 서면 외투를 입고 이곳을 찾아 해가 넘어가는 모습을 30분도 넘게 바라보는 것이 그다지 생소한 일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그러면서 점차 붉게 타오르는 해질녘 하늘보다 평범하게 어둠을 맞이하는 해질녘 하늘을 좋아하게 되었다.

붉게 타오르는 하늘은 너무나 강렬해서 바라보는 이의 마음이 차분해 질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짙지 않게 하늘을 물들이는 날의 해넘이는 아무리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나만 그런지 몰라도. 아니, 어린왕자도 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면 마흔 세번이나 반복해서 바라볼 수 있을리가 없었을 테니.

결국 남는 것은 강인함도, 강렬함도 아닌 평범한 것에 대한 익숙함이다.

사람 사이의 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이 익숙함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그와의 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가 친구든, 연인이든 상관없이. 그렇게 본다면 시작은 열정으로 하되 유지는 익숙함으로 하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내일은 간만에 카메라에 필름을 넣어 1박2일 일정으로 외출을 하게 될 것 같다. 한동안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들여다 보지 못했었는데 반갑기 그지 없는 일이다. 마음에 드는 컷을 잡아내야 할텐데. :-)




2008년 1월 4일 금요일

HP+Flickr 서비스

HP+Flickr 서비스에 이런 포스터 제작 서비스가 추가됐다. :-)


2008년 1월 1일 화요일

2008 년


안목항 일출, originally uploaded by Ki-young Choi(최기영).

새해를 맞는 첫번째 종소리를 듣기 위한 인파로 종각부터 광화문까지의 모든 거리가 북적거리던 어제, 늦은 퇴근을 한 아내와 함께 서울 시내를 피해 새로 개통된 외곽순환 고속도로의 북쪽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새로울 것도, 신이 날 것도 없는 12월 31일 이었다.

집에 돌아와 아내를 품에 안아주면서 힘들었죠..하고 물어보니 올 한해 참 힘들었다고 했다. 2008년 한해는 다를까? 달랐으면 좋겠다. 지금의 이 모든 고민들이 모두 해결되어 2009년의 첫해는 정말로 가슴 벅차고 기쁘게 맞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