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 5일 금요일

봄마을

[조선시대 남대문 밖 칠패시장. 혜촌 김학수]

모 두가 봄을 준비하던 때에 갑작스럽게 찾아와 미친듯이 함박눈을 퍼붓고 옷깃을 여미게 만들던 꽃샘추위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물러갔다. 연구실 동기의 말처럼 아무 감흥없이 맞이할 수도 있었지만 며칠전의 폭설때문에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지는 오후다.

인 간이 만든 달력상에선 한해의 시작이 1월일 수 있지만 체감으로 다가오는 한해의 시작은 봄이다. 얼어붙었던 모든 것들이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 시간이야 말로 한해가 시작한다는 느낌에 가장 적당하지 않을까. 어제오던 눈이 오늘도 오고 추위도 매한가지인 12월과 1월 사이에서 달력이 넘어간다는 사실로 인해 자기암시적으로 기뻐하는 새해맞이와는 분명 다르다.

그 리고 무엇보다, 양쪽으로 공유되는 계절이라는 점에서도 겨울은, 한해를 구분짓기에 적합하지 않다. 2003년의 겨울은 2004년의 겨울과 이어진다. 올해의 난...그 사실을 너무나도 절실하게 깨달았었다. 잊고 싶었던 모든 기억들이 해가 바뀌었음에도 달라진 것 없이 나를 얽매여 온다는 그 사실에 모든것을 버리고 도망가 버리고 싶을만큼 힘들었었다. 그리고..그렇게 힘든 시간속에서 난, 2004년이라는 새해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공감할 수 없었다.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그렇 게 생각한다면 봄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이 있느냐고 할 수 있지만, 정말로 신기하게도 요 며칠사이 난, 그동안 날 짓눌렀던 몇가지 일들을 이해하고 풀어낼 수 있었다. 마치 헌 것의 의미를 벗어 던지고 새로운 것을 준비하는 것 처럼. 그리고 향긋한 녹차 한잔을 손에 쥐고 창문 너머로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난 ‘봄마을’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있다. 한동안 온라인에서 대화명으로 쓰기도 했던 그 단어를.

‘마을’ 이라는 단어에 아무런 조사 없이 바로 붙여서 어울리는 계절은 봄이 유일하다. 그리고 그 자체만으로 주는 포근함으로 인해 난 지금도 ‘봄마을’ 이라는 단어를 무척 좋아한다. 아무 수식어 없이 적혀 있어도, 봄마을에는 왠지 따뜻함이 어려 있는 것 같다. 봄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푸근한 마음과 넉넉한 나눔을 갖고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봄마을에선 모두가 서로를 사랑하며 살 것 같다.

사람에게 웃음을 지어 보인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더욱이 서로가 불편한 관계였을 경우 더욱. 하지만 누군가가 먼저 용기를 내서 웃음을 보인다면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은 그 웃음을 보며 마주 웃을 것이다. 불편한 관계를 좋아할 사람이 없는 것 만큼, 그만큼 그들 역시 그런 웃음을 기다리고 또 바랬을 것이 분명하니까.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봄. 그리고 그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곳 사람이 사는 마을은 모든 곳이 ‘봄마을’이 아닐까. 가벼운 옷차림으로 삼삼오오 즐겁게 지나다니는 저네들의 모습을 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먼저 웃음을 지으며 사는 ‘봄마을’이 그저 상상속의 장소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번 봄에는, 항상 따스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이야기들만 들려오기를 기다려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