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 26일 일요일

Puzzle


가끔씩은...맞지 않는 조각때문에 고민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잡고 있다 보면 결국은 완성되는게 퍼즐 맞추기이다.

...

하지만 이런 퍼즐 맞추기에 가끔씩 비교되는 세상의 이런저런 일들은 퍼즐 조각이 몇개씩 없기도 하고, 똑같은 조각이 몇개씩 있기도 한 법인가 보다.

2003년 10월 19일 일요일

Omnibus



이틀간 하늘을 어둡게 하던 비구름이 물러갔다.

그리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서울의 마천루 사이로 파란 하늘과 상쾌할만큼 차가운 공기, 그리고 당연하지만 따가운 햇살이 여름의 초입을 그려내고 있다. 여름이라기 보다는 늦가을 차가와지는 공기와 따가운 햇살의 마지막 경주를 보는 듯한..그런 모습이다. 유일하게 그때와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은 나뭇잎의 색이 점점 푸르러 지고 있다는 사실뿐.

지금은 7시가 조금 넘은 저녁 시간이고 아직도 -여름으로 넘어가는 길목의 저녁이 항상 그렇듯이- 한낮의 뜨거움을 긴 아쉬움으로 남기고 있다. 그리고 반팔을 입기엔 조금 쌀쌀한 바람이 뜨거워진 아스팔트를 식혀주며 상괘함을 전해주고 있다. 마치 Kevin Kern의 음악을 듣는 듯한 경쾌함과 함께.

지금의 이 순간을 사랑한다.

의무감에 해야하는 일도 없고, 누군가와 만나야 하는 약속도 없는 저녁시간이 날 기다리고 있고 활짝 열어둔 창문으로는 누구도 불만을 갖지 않을만큼의 상쾌함이 밀려들고 있고 스피커에선 요란스럽지 않은 경쾌함이 흐르는 지금의 이 시간을.

현재가 경쾌하며 편안한데 굳이 과거와 미래로 아픔과 희망을 떠올리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나는 소리의 지배를 많이 받는다.

극장에서 영화를 볼때 삽입곡의 선율을 따라가느라 눈앞의 화면을 놓치는 것은 흔한 일이고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는 영화의 장면보다 영화음악과 그 음악의 분위기를 더 선명하게 기억한다. 어려서 어머니께 받은 교육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렸을 때 좋아했던 만화영화인 ‘미키 마우스’ 와 ‘딱다구리’를 볼때면 어머니께선 옆에서 항상 배경으로 나오는 음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고, 또 집중해서 들을 것을 요구 하셨었다. 대부분이 경쾌한 클래식 음악이었는데 그때문에 내가 지금의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는게 타당한 설명이겠지. 음악을 들어도 여러 장르의, 여러 음악가의 음악을 듣는 것은 못한다. 한가지 음악을 듣기 시작하면 그 선율에 내 감정이 따라가기 때문에 여러 분위기의 여러 음악을 들으면 내 감정이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음악을 들을때면 특정한 한 곡만, 그게 조금 지루해지면 한 음악가의 음악만을 듣는다. 그리고 곧 그의 색에 내 감정의 색을 맞춘다. 그게 어떤 색이든.

육성이 들어간 음악, 즉 노래 라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이 내게 있어서 말은 글이며 글자이다. 음악은 소리로만 호소해야 한다. 하지만 노래는 가사가 있고 그런 노래에서 가사의 비중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난 그런 음악이 싫다. 가사가 있다는 것은 느낌이 아닌 명확한 개념의 전달이기 때문에 내가 음악을 들으면서 머리속으로 그림을 그릴수도, 손가륵을 움직여 글을 쓸 수도 없다. 그래서 내가 선호하는 곡들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연주곡이다. 진짜 멋진 음악이라면 선율만으로 작곡가나 연주가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마치 화랑에서 그림을 볼때 그림의 아래에 작품설명을 자세히 붙여 놓는 것처럼, 멋진 선율을 갖고 있으면서 가사를 더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Kevin Kern은 참 멋진 음악가이다. 밤에 혼자 듣고 있으면 한없이 우울함속에 빠져들게 하는 몇몇 뉴에이지 음악가들과 달리 그의 음악은 따뜻한다. 밤에 혼자 듣고 있으면 한없이 마음이 따뜻해질 정도로.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그가 누구이든 따뜻한 눈빛을 보내주고 싶을 정도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사랑을 받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난 아직도 사랑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많이 서툴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것에 익숙해 진것도 아니지만 마치 하늘 사진을 찍기 위해 하루종일 하늘을 바라보고만 살 수 없는 것처럼 언제 줄지 모르는 상대의 사랑을 잘 받기 위해 늘 그만을 바라보고 살 수 없기 때문에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어렵다. 최소한 주는 것은 내가 주고 싶을때 줄 수 있지 않은가.

난 나를 사랑해주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그들의 눈빛을 사랑하고 그들의 손끝에서 전해져 온 편지를 사랑하며 그들의 미소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 마음만큼, 그들이 내게 주는 그 마음만큼 받아주질 못한다. 주는 만큼을 받지 못하고 덜 받거나 더 받고자 하면 상대가 손쉽게 내가 거북해 한다고 느끼거나 지나치게 요구한다고 느낄 것이 뻔하기 때문에 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

그들은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있을까? 마음껏 사랑해주지 못하고, 마음껏 사랑을 받아주지 못해 안타까워 하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있을까?

지금의 이 행복한 마음의 한귀퉁이를 떼어주고 싶어하는 내 모습을.

2003년 10월 16일 목요일

바람의 소리


형태가 없는 것을 본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다.

우리는 그것을 환상 이라고도 부르고 혹은 신기루 라고도 부르지만 어쨌든 그 이면에 따라다니는 근본적인 바램은 형태가 없는 그것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형상을 부여해서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바램은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고 옛 이야기속의 주인공으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간혹 우리 일상에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하나의 사물로 인식이 되기도 한다. 드물긴 하지만.

그러한 바램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사물로 ‘바람’ 이 있다.

바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사물이다. 누군가 바위를 굴린다고 해서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는 것처럼 공기가 기압차에 의해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고 해서 그것을 다른 이름을 부여해서 부른다는 것은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우리는 유독 ‘공기’ 라는 존재의 흐름에 의미를 부여했고 ‘바람’ 이라는 이름을 선물했다.

형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게 이름을 부여했기에, 바람은 우리에게 고정된 감상과 형태에 대한 인식을 주지 않는다. 사람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찾아오는 것에대해 우리가 익숙해질 정도로.

바람은 생명을 키우고, 기온을 유지시켜 주며, 간혹 모든것을 부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리’ 를 낸다. 바람은 공기의 움직임을 형상화한 것에 불과하고 공기가 소리를 전달하는 매질임을 고려해볼 때 그 매질 자체가 소리를 낸다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무척이나 신기한 일이다.(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연과학도라는 비난을 받기에 충분할지는 모르지만. :-)

바람이라는 것이 고정된 형상이 없기 때문에 생각하기에 따라 ‘바람의 소리’는 여러가지가 될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바람의 소리라는 것은 없다. 바람이 무엇인가에(관악기가 될 수도 있고 대나무 숲이 될 수도 있는) 휘돌아 가면서 소리를 내는 것이지 아무것도 없는 곳에 바람만 있다고 해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바람의 소리 라는 것은 존재하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음색과 음향을 갖고 있을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시작된 사색이 그것의 색과 향을 고민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미소와 고개짓을 유발하기에 충분하긴 하지만.
무작위로 틀던 음악들 사이에서 오늘 잊고 있던 ‘바람의 소리’ 를 찾았다.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래서 더욱 분명한 이유를 떠올리게 하는 모순된- 슬픔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결국 같은 곡을 한시간동안 반복해서 들어야만 했다. 마우스를 클릭하는 한번의 동작이면 되었을 것인데도.

다른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과 그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그래서 남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고 그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겠지. 그렇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을때 기쁜 것이겠지만.

난 그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봤고,그의 행동을 이해했고,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나 자신이 납득을 했고,그래서 이젠 마음의 평온을 얻었다.

참 공교롭게도 연구실 선배가 지금 옆에서 calling you를 틀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공교롭다 는 말이 잘 어울리는 것인지.

듣고있니?

내가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듣고있니? 그리고 이해하니?

슬픔의 원인은 그것이 아닌데...그로인해 떠올린 일에 대해서는 막상 아무런 슬픔도, 기쁨도 혹은 미세한 감정의 흔들림조차 없다는 것이 슬픈것인데 어째서 난 슬픔속에 자꾸 그 일을 밀어 넣으려 하는 것일까? 정작 그 일은 이제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고 있건만.


2003년 10월 6일 월요일

7년

어렸을 때 유난히 이사를 많이 다녔던 우리 집이지만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치던 시기부터는 단 한차례도 이사를 가지 않았고 그나마 이사를 다녔던 시기도 걸어서 30분 안쪽의 동네들 안에서(적어도 내 기억에는) 다녔던 것이기 때문에 내게 있어서 예전에 살았던 동네를 수년만에 찾아왔을때의 느낌 같은건 경험에 없다. 그리고 정말 우연찮게도 오늘 난 그런 경험을 했다.

95년 겨울부터 96년 겨울까지 정말로 많은 횟수를 찾았던 동네를 오늘 다시 찾아 갔다. 처음으로 그 동네를 찾아갔던 것과 비슷한 시간대에 두번째 찾아갔던 것과 유사한 이유로.

7년전에 걸었던, 그리고 유난히도 잊지 않으려고 애썼던 길, 골목등이 다시금 눈에 띠면서 느끼는 감정들. 그건 반가움이었다. 정말로 오랜만에 찾아온 그곳이, 비록 골목 어귀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과 가게들은 변했지만 풍기는 느낌과 구조가 변하지 않은채로 그냥 있다는 것은 정말로 반가운 일이었다. 괜스런 즐거움에 주위를 자꾸 두리번 거리게 만들 정도로.

언젠가의 글에도 썼지만 기억이라는 것은 감정의 해석이다. 7년전에 겪었던 그 많은 일들에 대한 지금의 내 감정이 평온하기 때문에 어쩌면 그 곳의 기억이 반가움이 된 건지도 모르겠다. 아마 좀더 과거였다면 그건 굉장히 괴로운 풍경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는걸 보면 더욱 확실하게. 하지만 그러한 생각의 흐름과 무관하게 반가움과 즐거움이라는 감정이 드는 건 분명한 사실이므로 애써 그러한 즐거움을 해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된다. 무엇이 지금의 날 이렇게 만드는 것일까? 분명 납득하기 어려웠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는 이해하고-납득해 버리는 이 모습은. 그리고 덕분에 난 나쁜 기억이 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지금 이순간에도 좋은 기억으로 남기고 있다. 물론 먼 훗날 지금의 기억을 돌이켜 보면서 어째서 그때 그렇게 바보같이 굴었는지를 화낼지도 모를 일이지만 중요한건 현재지 미래에 내가 어떻게 느깔까를 고민하는 건 미래의 나한테나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지금의 난 즐겁고 편안하다.

길은 변하지 않았다.

그때는 훨씬 춥기도 했지만, 그때 두리번 거리며 걸었던 길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람은?

이건 좀 복잡한 질문이다. 사람이 변했는가는 쉽게 답변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 그 사람의 모든면을 다 안다고 자신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이 그때와 다른 모습인지, 아니면 그때도 있었는데 내가 못느꼈던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분명 변했으리라 생각한다. 지난 7년의 시간동안 내가 많은 부분에서 변했듯이 다른 이들도 변했으리라 생각을 한다. 그 모습이 내가 느끼기에 좋은 쪽인가 나쁜 쪽인가는 이런 논의에서 이미 중요하지 않다. 물론 그 사람과의 만남에 영향을 줄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턱이 얼어버릴 것 같던 추위와, 난생 처음 들이켜본 소주병 나발에 대한 기억과, 20층을 올라가던 엘리베이터 그리고 올림픽 공원의 나무 아래에서 처음 먹어봤던 돌같이 딱딱했던 과자에 대한 기억까지.

넘치는 과거의 기억속에 휩쓸려 현실 감각을 잃어버릴 것 같은 밤이 다가오고 있다.

2003년 10월 5일 일요일

하늘빛



어렸을 때 사용하던 크레파스에는 하늘색' 이라는 색이 있었다. 옅은 파란색이었을 뿐인데 그 크레파스에는 분명하늘색’이라고 적혀 있었고 모두가 하늘을 칠할 땐 그 크레파스를 이용해서 색칠을 했기 때문에 항상 가장 먼저 닳아 없어지는 종류의 크레프스들 중 하나였다. 주황색을 놓고 가끔 오렌지색이나 귤색이라고 이야기를 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 색은 옅은 파란색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부르지 않고 항상 하늘색 이라고 불렀었다.

왜일까?

생각해보면, 하늘은 고정된 색을 지니고 있지 않다. 시각에 따라, 그리고 계절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색을 가진 존재이다. 그렇게 본다면 차라리 카멜레온의 색이 무슨 색이냐는 정의를 내리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색은 항상 옅은 파란색이라고 모두에게 인식되어 있었다.

내가 대학에 오기까지,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동아리 후배 한명의 아이디를 접하기 전까지 내게 있어서도 하늘색은 그저 고정적인 색일 뿐이었다. 어렸을 때 그림대회에 억지로 나가면 특이하게 그리는 것이 입상에 유리하다며 손발은 크게, 사람 얼굴이나 다른 색은 내가 실제로 보는 것과 다르게 그리도록 강요 받았을 경우에나 다른 색으로 칠했을 뿐이다.

그 후배의 아이디는 내가 하늘색 이라고 느끼고 있던 색과 어찌보면 같은 뜻이지만 어감은 전혀 다른 단어인 `하늘빛’ 이었다. 한번도 하늘의 색을 `빛’이라는 단어로 표현해본 적이 없었고 그런 표현을 접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내게 있어서 그 단어는 무척이나 싱그러운 느낌으로 찾아왔다.

하늘색 과 하늘빛

하늘빛은 고정적이지 않은, 단순한 크레파스로 표현할 수 없는 빛이다. 크레파스 하나로 칠할 수 있는 하늘색 처럼 빛을 흡수해서 색을 내는 물감이나 크레파스로는 절대로 표현할 수 없는 빛이다. 샐로판지처럼 빛을 투과시키는 성질에 의해 표현되는 그런 빛이다. 오늘 하루종일 고민을 했다. 하늘빛 을 영어로 표현하면 어떤 단어가 될 것인가. lucid 정도면 적당할까.

가을이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며칠째 서울 하늘이 스모그를 벗어 던지고 있다. 그저 파란색뿐이 아닌, 햇살로 인해 반짝거리는 느낌마저 주는 그런 파란색. 이럴때가 `하늘빛’ 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때가 아닐런지.

어느새 야경이 멋지게 펼쳐지는 시간대가 되어 있다. 무심코 지어지는 미소. 이 역시 하늘빛 의 한가지가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