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 26일 금요일

늦장마

어느덧, 매미소리가 잦아들어가면서 귀뚜라미 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인식시키기라도 하듯, 차가운 공기와 함께 비가 오고 있다. 혹자는 늦장마라고 부르기도 하는, 여름의 마지막 인사가.

유난히 더운날이 적었던 여름이었다. 온 세상이 떠내려 갈 것 같은 폭우도,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던 열대야도 없었다. 더울만 하면 비가 내려 이 도시의 열기를 식혀버리고, 그렇다고 긴 장마를 지나치지도, 여느해처럼 쉴새없이 올라오는 태풍에 촉각을 곤두세우고는 이 태풍이 일본열도로 갈것인지 아니면 우리나라에 상륙할 것인지를 마치 스포츠 중계방송 보듯 했던 시기도 없었다. 굳이 정의하자면, 참 “조용히” 지나간 여름이다. 남부지방은 비피해도 제법 있었다지만, 내 체감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일들을 억지로 인식하려 애쓰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다.
그래서일까? 조용히 지나가던 여름이 아차 싶어서 늦게나마 장마를 불러오고 있는 이유가. 며칠째...근 일주일이 넘도록 우중충한 하늘과 연일 쏟아붇는 빗줄기를 봐야만 했다. 공식적인 장마철에마저 이런 모습은 보지 못했었는데.

그래도 덕분에 서울 하늘의 먼지들이 많이 씻겨졌는지, 간간히 개인 하늘은 가을하늘이 무색할 만큼 파랗고 예뻤다. 지나치게 많이 나온 수리비 견적으로 수리를 포기해 버린 내 카메라가 아쉬울 만큼..그만큼 예뻤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다. 이 비가 끝나고 나면 이제 가을이 시작될 거라고.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입밖으로 내어 말한다고 구박할 수도 있지만, 세상엔 사랑과 같이 다 아는 사실도 소리로 변화시켜 내보내야만 다가오는 것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고 그냥 멀어져 버리는 것들도 있다. 다시금 다가오긴 하지만, 계절은 분명..그런 존재다. 입밖으로 내지 않으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쳐서 멀어져 버리는.

항상 그랬던 것 같다. 매년 가을이 오면, 난 계절을 잡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계절을 멈추고 싶다는 의미가 아닌, 말 그대로 계절이라는 것을 잡아보고 싶다는 생각.

지금의 난 어떤가?

혼란스럽게 찾아온 2003년. 그 절반-6월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분명 한해의 절반은 여름이 끝나는 시점이다-을 보내고 있는 지금은 정 반대로 참으로 차분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그런 감흥은, 차가와 지는 공기속에서 구체화 된다.

지금의 난, 더할나위 없이 평온하다. 그 사실이 너무나 행복할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