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 6일 토요일

10초의 환의

어제 아침에 왕십리에서 지하철을 타고 강변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한양대역을 벗어나는 순간 지하철은 땅 밖으로 나온다. 땅밑으로 지나다니는 것을 유난히 싫어하는 나이기에 이 순간의 기분이라는 것은 크지는 않지만 무척 반가운, 그런 기분이다. 그리고 어제역시 그런 기분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그 햇살이 너무나 강렬해서 잠시 눈을 찌푸려야 했다는 것.

그 햇살은 마치 ‘선물’ 같았다. 하루키의 장편소설 ‘태엽감는 새’에 나오는, 우물을 비추는 10초가량의 햇살처럼, 내 전신을 따뜻하게 휘감으며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마치 마미야 중위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눈을 감고 그 햇살의 강렬함을 온몸으로 느껴보려 했다. 하지만 강렬하다란 느낌은 언제나 처음 찾아왔을때에만 허락되는 것이기에 고작해야 10여초가 흐른 후에는 그 햇살에 익숙해져 버린 날 찾을 수 있었다. BWV 1060-alegro에서 찾을 수 있는 환희. 그리고 정말로 짧은 허락.

문득 쇼팽의 nocturns가 듣고 싶어졌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처음으로 접한 하루키의 소설은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상실의 시대 라는 제목으로 출판이 되었던 그 소설이다. (이후에도 계속 불만이었던 것은, 어째서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바꿔서 출판을 해야 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하루키는 이 소설의 제목을 비틀즈의 ‘Norwegian Wood’라는 곡에서 따왔다고 했는데 난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 비틀즈의 곡중에 노르웨이의 숲 이라는 곡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내가 이 곡을 들은것은 참 웃기게도 소설을 5번째인가 읽었을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곡을 들은 이후로 더욱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에 불만을 갖게 됐다.

하루키는 한국인 독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이야기 했다.

‘제가 이 소설을 통해 나타내고자 한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소설을 나타내는 단어로 ‘상실’은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제목을 짓게된 비틀즈의 원곡도 어느정도의 상실-이것을 상실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면-을 노래하고 있고 소설속의 주인공도 많은 상실을 겪긴 하지만, 그것은 결국 ‘사랑’을 나타내기 위한 반대 급부로써 필요했을 뿐이다. 마치 우유의 단맛을 이끌어 내기 위해 약간의 소금을 타서 마시는 것처럼 ‘상실’이 들어갔기 때문에 하루키가 소설에서 상실의 반대쪽 끝에 위치시킨 ‘사랑’ 이라는 단어가 더 아련하게 가슴에 와 닿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사랑의 반대급부는 상실이며 상실이 있고난 후에야 보다 확연하게 사랑을 깨닫는 것일까? 어차피 하루키와 나 사이엔 시각차라는 것이 존재하므로 무조건적으로 동의하고픈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생각해볼 가치는 충분히 있는 것 같다. 지금의 내게 사랑이 가장 큰 화두인건 아니지만 나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스스로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어쩌면 난 나 자신의 해답을 얻기 위해 이 소설을 다시 읽고 노래를 듣는 건지 모르겠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일까.

난 아직도 하루키의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그보다는 이해가 안되는 이야기들이 몇군데 있다는 쪽이 좀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내가 보지 못하고 있는게 도대체 무엇일까.
내가 듣지 못하고 있는게 도대체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