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21일 금요일

휘발성 기억

전에도 느꼈지만 내 생각의 우물은 항상 해가 지고 난 이후에야 자신에게 글이라는 두레박이 드리워 지는 것을 허락한다.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눈에 보이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은 상황에서야 난 내 생각을 내면으로 돌릴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일까? 어쩌면 단순히 습관일 수도 있다. 낮에는 밖을 돌아다니고 밤이되어야 집에 돌아와 키보드에 손을 얹게 되는..그런 습관의 결과.

뭐, 어느것이든 그 이유가 중요한건 아니지만.

지금은 아침이라기엔 조금 늦고 낮이라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다. 인간이 만든 규칙에 의하면 11시 30분이라는 굉장히 자주 말해지는 시간 단위로 설명할 수도 이겠지만 그보다는 ‘무엇보다는 이르고 무엇보다는 늦다’ 라는 식으로 설명하는게 좀더 덜 어색한 그런 시간이다.

어제 밤에도 그런 휘발성 기억을 상당히 떠올렸고 오늘 아침이 되자 어제 어떤 생각을 했었다는 것만 기억에 남아있을 뿐 손가락을 통해서 펼쳐지지는 않는다. 다행이라고 할까? 그다지 밝은 느낌은 아니었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를 남과 해본적은 아무래도 없는 듯 하니까. 난 어떤 생각이 들때 단순히 그 생각이 아니라 그걸 글로 옮길때 적절히 표현이 될만한 표현들까지 함께 떠오른다. 그래서 머리속으로 글을 쓴다. 예를 들어, 오늘 아침에 학교오는 길에 문득 삼각김밥이 먹고 싶어서 편의점에 들려 김밥을 사들고 나오면서 껍질을 벗겼을때 그 김밥은 양념장이 김밥의 포장을 벗기는 반대쪽이 아닌 벗기는 쪽에 있었다. 지금껏 한번도 본적이 없는데 아마도 만드는 과정에서 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걸 보는순간 머리속에서는,

‘당연할 거라 기대한 일이 어긋날때, 비록 그 사실 자체가 지극히 사소하고 상황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단지 기대가 어긋났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받는 느낌은 굉장히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런 느낌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거나 혹은 그 느낌을 잡아내지 못할뿐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기대를 멋지게 벗어난 이 삼각김밥의 형태에 대해 굉장히 미약하고 짧지만 당혹스러움과 어떻게 먹는게 보다 효율적이느냐-김이 양념장을 덮지 못하고 있었기에- 하는 대책에 대해 고민했다. 정도의 자이는 있을 수 있지만 난 이런 감정을 배신감 이라 정의한다’

라는 생각을 한다. 다행이 이 생각이 머리속에 남아있는 동안에 학교에 도착을 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다지 틀리지 않고 옮길 수 있었다. 물론 저런 단어들이 머리속에 글을 쓰듯 차례로 떠오르는 건 아니지만-이쯤에서 난 이걸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래도 글을 쓸때 충분히 단어로 연상될 만큼의 형이하학적 영상으로 머리속을 스쳐간다. 그래서 생각이 드는 시간은 불과 몇초지만 글로 쓸때는 몇페이지에 걸쳐서 쓸 수 있다. 문제는 이 생각들이 대단히 휘발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 생각이 들고 한시간정도만 지나도 내가 어떤 사건을 겪었는지는 기억에 남지만 글로 옮길때 필요한 그 무언가는 사라지고 난 후다. 그럴때 나는 큰 실망과 함께 키보드를 옆으로 치울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생각이 주로 머리속을 휘감는 밤시간에 나는 그 생각들을 글로 옮길 수 없고 그래서 아침에 학교에 오고나면 대부분을 잃고 만다는 사실이다. 어제는 책상에 앉아 직접 손으로 옮겨볼까도 시도해 봤지만 도저히 머리속을 스쳐서 지나가는 생각의 속도를 볼펜을 움직이는 손가락의 속도로는 따라잡을 수 없었다. 올지 가능하다면 내 말하는 속도와 그다지 차이가 없는 타이핑을 통해서만 가능할 뿐 기타 어떤 방법으로도 그 생각의 속도를 쫓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새 글을 쓰기 시작한지 15분이 넘어서고 있다. 이렇게 오랜시간 글을 써본게 얼마만인지. 적절한 표현을 찾느라 많은 시간을 고민했다는 생각에 그래도 흐뭇하다. 대부분의 글에서 난 표현을 찾기 위해 고민하느니 대충 표현이 떠오르는대로 써버리고 마니까.

창밖은 이제 완전히 젖어 있고 일요일답게 아무도 오가는 사람이 없다. 지금 자연대 앞은 온전히 바람과 비의 세상이다. 창문 너머에서 이렇게 그들의 파티를 바라보는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나에게 이 멋진 풍경을 선물해준 하늘이 오늘따라 무척 고맙다.

2002년 6월 10일 월요일

아들 생일

내 방 책상 앞에는 달력이 하나 걸려있다.

올 초에 집에서 가져온 달력인데 집에서 가져오던 날 어머니께서 집안의 행사들과 어른들의 생신등을 표시해서 주신 덕에 여기저기에 동그라미와 함께 이런저런 말들이 적혀있다.

평소에 달력을 자주 보는 편은 아니다. 자주 본다기 보다 거의 보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을 정도의 비중이라면 맞는 말일까? 워낙 집에 있는 시간이 짧은 탓도 있지만 날짜 보다는 요일로 시간을 따지는 경우가 많은 현대인 답게 나도 시간이 흐르는 것을 요일로 느낀다.

오늘은 월요일...오늘은 수요일..오늘은 토요일..

어쩌면 직장인들보다도 학생들이 더 요일에 민감한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학생들에게는 각 요일마다 다른 얼굴로 찾아드는 “시간표” 라는 것이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학생에게 1년은 7일일까? 1년 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인식하는 시간단위의 핵심이 7일 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겠지.

그런 이유로 어느날 문득 달력을 바라보면 한달전인 경우는 물론이고 가끔씩 두달전 달력이 그대로 걸려있는 경우도 왕왕 있다. 문제는 그걸 보고도 그저 피식 웃고는 넘어간다는 것. 오늘 아침의 내방 달력은 4월이었다. 어째서 4월일까를 고민하다가 중간고사때 날짜를 따져보느라고 달력을 자주 쳐다봤던 일이 기억났다. 아하, 그랬구나. 뜻밖의 사실을 알았을때의 유쾌함. :-)

그렇게 지난 시간에 잡혀 있는 달력을 들어서 묵은 시간들을 뜯어 냈다. 그러고 보니 5월달에도 집안 어른들 생신이 몇번 있었다. 내가 굳이 챙겨드릴 필요는 없는 분들이라 집에서도 별 말씀이 없으셨겠지만. 재밌는 사실은 분명 그런 메모를 남기신 분은 어머니인데 쓴사람은 나인것 처럼 되어 있다. ‘외숙모 생신’ 이라던가, ‘작은아빠 생신’ 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풋. 난 ‘아빠’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지 꽤 오래 됐는데. 어머니께는 아직도 내가 아빠, 엄마 할때의 모습으로 남아있나 보다.

그렇게 달력을 보면서 또 한차례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던 건, 6월 10일에는 동그라미와 함께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들 생일’.

아마 당신께서도 인식하지 못하셨을거다. 애써 내 입장에서의 호칭으로 이런저런 행사를 적어나가시다가 내 생일에 이르러서는 그런 생각에 앞서 아들생일 이란 단어가 앞서서 튀어 나오셨겠지. 나한테 아들이 있을리 없으니까. :-)

2002년 6월 10일.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맞이하는 8번째 생일이다.

2002년 6월 8일 토요일

6시간의 청주행, 버지니아 울프 그리고 야간버스

별안간 하게된 약속이긴 했지만 단비와의 생일파티 약속이 오늘이었다. 학교에서 볼일을 모두 마치고 저녁때쯤 도착하게 시간을 맞춰 터미널에서 버스에 몸을 실었다. 꼭 1주일만의 청주행인가.

조용한 파티를 원한다는 말에 다른 사람들도 부르지 않고 둘이서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고 바에가서 쥬스와 술을 한잔씩 마셨다. 누군가와 차분하게 둘이 앉아 이야기를 하면서 몇시간을 즐겁게 보낸게 얼마만의 일인가. 다른 이들과 편안한, 그리고 조용하지만 즐거운 시간을 보내본게 무척이나 옛날 일인듯 싶다.

이야기를 하던중에 버니니아 울프의 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요즘들어 새삼스럽게 감탄하고 있는 버지니아 울프의 문체와 표현력에 동감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주위 사람중 하나가 바로 단비였기 때문일까. 일전에 나를 절망하게 했던 일, 바로 글로는 순간을 표현할 수 없다라는 사실을 보기좋게 깨뜨려 버린 작가. 오히려 너무나 잘 표현을 했기에 글속의 인물을 내 자신의 가상인격으로 받아들이기 전에는 글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정도의 표현력. 그런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서로의 감탄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일면 즐거운 일이 아닐까.

2시 반에 청주행 버스에 몸을 실어 8시 반 동서울행 버스에 다시 탔으니 정확하게 6시간을 청주에서 보낸 셈인가? 아니, 청주에 있었던 시간은 4시부터 8시 반까지니 4시간 반을 있었던 것이 된다. 즐거운 ‘나들이’ 라고 할만한 시간 아닌가. 겨울답게 돌아오는 버스는 어둠속을 달렸다. 불이꺼진 버스 안에서 어두운 고속도로를 바라본게 얼마전 일인가. 기억이 맞다면 지선이를 만나러 포항에 다녀왔던게 마지막인것 같다. 그게 벌써 반년전 일이 되어가고 있는건가...

[의외의 공간에서 시간은 정해진 규칙보다 빨리 흐르는 듯 하다.]

그때도 그랬지만 어둠속을 달리는 버스는 기묘한 속도감을 준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에테르속을 질주하는 어떤 가상의 물체와 같은 느낌 이랄까. 미처 어둠속에 주위를 스쳐가는 도로주변 풍경에 신경을 쓸 틈을 주지 않는다. 그때문일까? 야간버스를 탈때마다 상념에 빠져드는 것은.
감정과 현실이라...

인정할것은 인정해야 하지만 그 두가지를 소재로 생각을 정리해 글을 쓸 수 있으려면 아직은 좀더 시간과 고민이 필요할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