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1월 6일 월요일

차를 마신다는 것

하루종일 마신 커피가 지금것까지 하면 대여섯 잔은 되는 것 같다. 무슨 카페인 파워로 살아가는 사람도 아니고 도대체 왜이리 많은 커피를 마시는 건지. 나름대로 줄여본다고 묽게 탔는데 생각해 보니까 맛은 묽더라도 몸속에 들어가는 카페인은 줄지 않는것 아닌가. 공연히 더 맛없는 커피를 마시게 됐다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온다.

무슨일을 할때면 참 차를 많이 마신다. 집에서야 녹차를 우려내어 마신다고 하지만 밖에 나와서까지 그런걸 바라는건 사치고 그저 봉지에 들어있는 인스턴트 커피 한잔이면 만족할 수 있다. 우연찮게 원두커피라도 마실 수 있으면 그야말로 만세! 순간 행복이 느껴진다.

차를 많이 마시게 된건 생각해보면 중국에 갔었던 시기에 든 습관인 것 같다. 그전까지는 차라는 것 자체를 그다지 많이 마시지 않았다. 밥을 먹고 나서나 시험기간이면 대학생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건물내 자판기 커피조차도 그다지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중국에 갔을땐 어쩔 수 없이 녹차를 마셔야 했다. 우선 음식이 너무 기름졌기 때문에 차를 마시지 않고 식사를 마치면 식사후에 속이 느끼해서 하루종일 괴롭기 때문이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식사시간 내내 틈만나면 녹차를 입에 부어 넣어야 했다. 그리고 두번째는 그때 지냈던 숙소가 참 추웠기 때문이었다. 연변과기대 VIP 기숙사였는데 욕실과 붙어있는 샤워실이 방에 함께 있었다.(대부분의 학생 기숙사는 그저 침대와 책상 하나 뿐이었다.) 하지만 말이 VIP기숙사지 온수를 틀면 한참을 뜨거운 녹물이 나오는 곳에서 샤워를 할 수는 없었으며 밤이되면 어지간한 창문따위로 막을 수 없는 추위가 방안으로 몰아쳤다. 내복 2개를 껴입고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보온병에 식당의 따뜻한 물을 받아와서 잠들기 전까지 룸메이트 형과 녹차를 우려내서 마시곤 했다. 처음엔 우려낼줄을 몰라 너무 진해서 쓰기까지한 녹차를 마시기도 했었는데 한달을 지내는 동안 제법 내 입맛에 맞춰서 우려내는 시간을 조절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해서 든 차마시는 습관은 귀국후에도 여전해서 이제는 집에 녹차부터 원두커피에 유자차까지 갖추고 원하는 차를 골라서 마시고 있다. 생각해 보면 난 입맛은 까다로운 편이 아니어서인지 차도 특별한것만 마시는 등의 까탈스러움을 부리지는 않은 것 같다. 내가 원한건 그저 입안을 은은하게 퍼지는 어떤 향과 맛이었던것 아닐까? 그런면에서 본다면 설탕과 밀크를 듬뿍 넣은 자판기 커피는 내 취향이 아닐수도 있지만 그것역시 별 부담없이 마시는걸 보면 역시나 입맛이 무딘것 같다.

차를 마신다는 것.그것은 어떤 사치스러움도, 여유스러움도 아닌 즐거움을 위한 행위가 아닐런지. 간혹 기름진 음식을 먹을때는 어쩔 수 없이 차를 마시기도 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역시 즐거운 식사/식사후를 위한 행동이었다. 따라서 입에 넣어 즐거운 액체라면 모두 ‘차’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쉽게 손에 넣을수 있는 온갖 캔음료들도 그런 맥락에서 ‘차’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이 가져다 준 현대의 ‘차’. 그렇게 본다면 ‘다도’라는 것도 그렇게 형식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실제로 다도라는 것도 보다 맛있는 차를 우려내기 위한 형식과 맛있게 차를 마시는 방법들을 경험에서 터득해 그것을 절차화 시켜놓은 것인데 후세 사람들이 그 형식을 예절로 착각해서 너무 격식화 했을 뿐이니까. 보다 맛있게, 즐겁게 차를 마시기 위한 방법이 다름아닌 ‘다도’아닐까. :-)

글을 쓰는 사이에 커피가 다 식어 버렸다. 먼저 마시고 글을 쓸걸..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루렴 어떠랴? 식은 커피역시 나름대로의 맛이 있고 느낌이 있는걸.

커피향이 진하게 묻어나는, 즐거운 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