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 10일 일요일

우유 한 잔, 포도주 반 잔

젖은 도로를 질주하던 자동차 타이어 소리가 점차로 잦아들고 있다. 비가 그쳐가는 것인지, 아니면 자동차 수가 줄어들어 가고 있는 것인지. 창쪽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을 무슨 고집에선지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는 애써 소리만으로 밖의 모습을 상상하려 애를 쓰고 있다.

아까부터 목이 말라 계속 물을 마시고 있다. 냉장고에 넣어두는 것을 잊어 그저 따뜻하다는 것만 간신히 면한 물. 마셔도 그다지 갈증 해소에 도움이 되는 것 같지가 않다. 맥주나 한잔 마셔볼까?
지난 수개월째 먼지만 쌓이게 놓아두고 있는 빨간색 커피 메이커가 유난히 눈에 띈다. 그렇지만 이렇게 갈증이 생기고 있는데 커피를 마시는 건 그다지 유쾌한 기분이 아닐것이 틀림없다. 마음 한편으로는 마시진 않더라도 향긋한 커피 향을 느끼고 싶다는 욕구도 있고.

살이 데일 것 같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다시 한동안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물로 몸을 식혔더니 피부가 발갛게 달아 올랐다. 그리고 온몸을 팽팽하게 차오르는 기분좋은 긴장감. 정말 옆에 누군가 있다면 같이 가볍게 맥주한잔 나눴으면 싶은 밤이다. 술을 마시고 싶은건지, 아니면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건지 구분을 할 자신은 없지만. 음악이 듣고 싶어서 음악 사이트에 접속해서 몇몇 곡들을 골라서 듣고 있다. 그다지 시끄럽지 않은, 좀 잔잔한 곡으로. 조용한, 그리고 가급적이면 육성이 들어가 있지 않은 연주곡들을 좋아하는 이 취향은 아마도 죽을때까지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과 웃음이 입가를 잠시 스쳐간다.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냉장고에서 한동안 혼자 있던 포도주를 꺼내서 마셔볼까? 유리잔에 반잔만 따라서 마셔도 제법 향과 맛을 느낄 수 있을텐데. 아침엔 우유 한잔, 밤에는 포도주 반잔인가?

무척이나 오래 전 같은 오늘 아침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무척이나 오래전 일이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오늘아침이다. 오늘 하루가 내게는 그렇게 길었을까?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비오는 것을 여유있게 구경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러지 못했다. 그렇다고 무엇인가를 특별히 한 것도 아니었는데...

음악을 크게 틀어놔서인지 창 밖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고 있다. 지금은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듣고 있다. 좀 긴 음악을 찾다가 이게 나왔다. 손끝을 통해 지난 수개월간 축척되었던 생각들이 아까의 ESC키 사건을 통해 모두 날아간 모양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아까의 글이 나오질 않는다. 고작해야 몇분전의 일인데 이렇게 까맣게 잊을 수도 있는 것일까?

아무것도 하기 싫은...가볍게 술에 취하고 싶은 밤이다.

2000년 9월 6일 수요일

계절을 잡다

비가 오고 있다.

학교에서 점심먹으러 가면서 후배들과 이 비가 그치면 이제 겨울이 오겠다..라는 말들을 하면서 갔는데 동호회에 올라온 글을 보니 태풍이 올라오는 거란다. 겨울이 올줄 알고 있었는데 아직도 우리의 여름은 끝나지 않고 있었나보다.

계절이 바뀐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바뀌다’라는 말에는 무엇인가 하나는 사라진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까? 설혹 그렇다고 해도 그런 것들을 새삼스레 느낄만큼 감성적인 면은 없기 때문에 내가 느끼는 슬픔은 그런 측면은 아닌 것 같다. 좀더 실리적으로 말을 하면 아직 겨울옷을 준비 못했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겠지.

이유가 무엇이 됐든, 계절이 바뀌고 있고 그런 탓에 요즘들어 자꾸 툭하면 기분이 가라 앉는다. 창밖으로 들리는 젖은 도로의 타이어 소리도 귀에 거슬리고. 온 방안을 휘감는 야릇한 냄새의 원인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춥다는 이유로 환기를 잘 안시켜서일까? 오늘 새벽에는 방문을 있는대로 다 열어놓고 공기를 교체해야 겠다. 계절의 케케묵은 냄새를 간직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까.

여름이 지났는가?

돌이켜 보면, 지난 수개월동안 유난히 많은 땀에 시달렸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때 여름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렇지만 지금의 기억속에서 여름은 이미 다른 곳으로 사라지고 없다. 왜일까? 왜 지난 시간속에서 체험한 일들은 현실의 기억 속에서 그 빛이 희미해지는 것일까? 누구나 자신의 기억속에 계절을 담고 있다. 나도 그렇고 이글을 읽을 누군가도 그렇다. 그리고 그 기억속의 계절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처럼 짜여져 있는 4계절은 아닌 것 같다. 기억속에 남아있는 사건들의 순서가 시간의 흐름대로 매겨지는 것이 아닌것처럼.

오늘 계절을 잡았다.

방안 가득 수북히 쌓여 있는 프린트물 사이에서 지나간 여름과 남몰래 숨어든 가을을 잡았다. 커피냄새, 그리고 소지로의 오카리나 연주소리.

밖에는 비가 오고 있고 내 방에는 계절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