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5월 15일 월요일

138 계단

언제부터였을까?

오늘 아침에 자연대로 향하는 138계단을 오르다보니 문득 아카시아가 흐드러지게 피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눈으로 봐서가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미처 깨닫기도 전에 잦아든 아카시아 향기로.

걸음을 멈춰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여름이면 마치 수풀로 뒤덮인 터널처럼 되는 138계단 곳곳에 아카시아 꽃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직 8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어서 계단을 걷고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순간 찾아든 기분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상쾌했다. 잠시 계단 난간에 기대어 그 향기를 느끼지 못하게 될때까지 나를 머물게 할 만큼.

요즘, 참 마음 편하기도 하고 생각이 많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복잡한 심경을 견디지 못해 힘들어 할 정도는 아니니까 마음 편하게 지낸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겠지. 3일동안 15시간정도 버스를 탔더니 생각할 시간이 많아서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덕분에 이런저런 일들을 정리할 수 있어서 좋긴 했지만.

어제 상숙이에게 밤늦게 전화가 왔다. 의외의 전화이기도 했거니와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하거나 받는 녀석이 아니기 때문에 무척 놀랐었다. 이유인즉 좀 싱겁긴 했지만 내가 보냈던 편지를 보다가 생각이 났다는 것이었다. 내가 군에 있을때 나한테 가장 많은 신경을 써줬던 녀석이기도 했지만 내가 가장 많은 편지를 보낸 녀석이기도 했는데 그 편지를 아직도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화를 끊고 잠을 자려고 누워서 그 당시를 생각해보면서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매일같이 누군가에게 글을, 편지를 쓰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 시기였으니까 내가 생각해도 엄청나게 많은 편지를 보냈다. 그중에 학과 친구들이나 선후배들에게는 거의 한통도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로. 그렇다고 그때 특별한 일이 있어서 그렇게 많은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로 받는 사람이 기가막혀 할 정도 분량의 편지를 썼었다는 사실이 지금도 기가 막히기만 할 뿐이다. 올 가을쯤 결혼 할 것 같다는 상숙이의 예전 말이 떠올랐다. 휴학하고 났더니 쓸쓸해 죽겠다고, 나한테 편지라도 쓰려고 하고 있으니까 답장 안하면 가만 안둔다고 엄포를 두던, 자기는 아무래도 사랑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던 녀석이 어느새 결혼 이야기를 꺼낼만큼 시간이 흐른걸까? 동갑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항상 동생같이 생각되던 녀석이어서인지 신기하기만 하다. 어제 영우 녀석이 결혼식을 올렸고 마치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이 올해를 기점으로 저마다 자신의 짝을 찾아가고 있다. 이런일은 좀더 먼 훗날의 일로 못을 박아버린 나이기에 그다지 부럽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도 훗날의 내 짝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사랑은 편안하고 즐거워야 한다. 사랑을 하는 것 자체로 힘들고 괴롭다면 그것은 잘못된 사랑이며 또 사랑이 아니다. 참 간단한 세상의 이치중 하나인데 이것을 깨닫기까지 왜 그리 오랜 시간과 고통이 수반되어야 하는건지. :-)